<채식주의자>를 생각하며



<채식주의자>를 생각하며

-타나토스와 리비도- /김덕종

 

2016, 번역 노벨 문학상이라고도 하는 맨부커상을 수상한 당시에 한강의 채식주의자(창비)는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 내가 영어를 공부한 것에 비하면, 불과 6년 공부한 한국어로 그런 상을 받은 영국인 번역가 데보라 스미스(Deborah Smith)가 정말 대단해 보였다. 한글이 그렇게 과학적이고 쉬운 글인지, 아니면 작가의 피나는 노력의 결과인지도 궁금하였다.

그러나 정작 이 소설을 읽으며 나는 모르는 단어 때문에 사전을 몇 번씩 찾아봐야 했으며, 한국의 토속적인 묘사가 곳곳에 나타나서 이 번역이 쉽지는 않았겠다 싶었다. 마치 호러물이나 공포영화를 보는 듯 섬뜩한 마음으로 또는 의식이 곤두서고 강한 자의식으로 깨어서 나는 그 책 속으로 깊이 빨려 들어갔다. 세편의 단편을 연작으로 구성한 작가의 의도 덕분에 3D로 감상한 느낌이다.

 

1. 왜 채식주의자가 되었을까?

주인공은 결코 채식주의자가 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사람들이 씌워준 이름에 불과하다. 영혜는 좀 내성적인 보통의 주부였다. 내가 아는 많은 사람들 중의 하나인. 남편도 그런 매우 개인적이고 이기적인 필부 중의 한 사람이다. 아침을 채근하는 남편의 재촉에 위축된 영혜는 손을 베이고 떨어진 칼날 조각은 고기조각에 섞여 남편의 입속에서 튀어나왔다. 남편의 분노표출과 손가락에서 솟는 피와 이 황당한 순간의 견디기 어려운 정서적 진공상태!

이 스트레스는 그날 밤 꿈을 꾸게 한다. 꿈속에서 그녀는 주지육림 속을 헤매다 피범벅이 된 자신의 얼굴과 전신을 비쳐보며 경악한다. 그것의 본질은 억압된 자아의 죄의식이다. 잠재의식 속에 갇혀있던, 열 살 때 자신을 문 개를 아버지가 오토바이에 매달고 달려서 죽이는 광경과 그 개고기 죽을 먹었던 것에 대한 죄의식, 그리고 일상생활 속에서 느꼈던 모든 억압에 대한 분노와 죄의식이 그로 인하여 한꺼번에 터져 나온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더 이상 고기를 먹지 못하는 강박장애를 갖게 된 것이다.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건강을 위한 또는 종교적인 의미의 채식주의자는 결코 아니다. 고기를 먹는다는 것은 다른 생명체를 죽이는 일이다. 육식을 거부한 것은 자신 내면의 야수성 혹은 죄의식을 감지하기 시작하면서 처벌의 한 형태로 자기파괴를 시작한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2. 몽고반점의 의미는?

연작 두 번째 소설은 몽고반점이다. 영혜는 육식을 거부하며 타나토스를 표현한다면, 형부는 처제의 엉덩이에 남은 몽고반점은 인간의 리비도를 표현한다. 이 역시 억압된 자아와 싹틔우지 못한 예술적 감성이 몽고반점을 만나서 무한한 상상과 영감을 불러일으키고 나아가서 그런 의식을 작품으로 완성하려는 노력이 결과적으로 윤리와 도덕의 한계를 자연스럽게 넘고만 나약한 그러나 자신의 열정에 충실했던 한 인간의 초상이다.

이 소설에는 남자가 몇 명 나온다. 전형적인 엄한 가부장인 아버지, 아주 개인적이고 이기적이고 편협한 영혜의 남편, 헌신적인 부인 덕에 자기 예술세계에만 빠져있을 수 있는 나태한 예술가, 강하고 거칠게 자기의 보호막을 치고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는 남동생, 엄마의 사랑을 얻으려고 혹은 엄마를 위로하기 위하여 노력하는 어린 아들 지우.

남자들은 하나같이 다른 캐릭터로 설정이 되었지만, 이들 모두에게 나는 동질감을 느낀다. 내 몸이 아주 많은 유기물과 세포로 이루어진 복잡한 존재인 것처럼, 나의 마음도 단 하나의 성질만 있는 게 아니라 이런 마음 저런 마음 좋은 마음 나쁜 마음이 다 섞여 있다는 자각이다. 어쩌면 이것은 생명의 본태적 리비도요 에너지로써 인간을 움직이게 하는 본질이다. 나의 몽고반점은 무엇일까? 죽음의 그림자 타나토스가 드리워진 피폐한 육체의 뒷면에서 꿈틀거리는 리비도, 죽음과 욕망의 대비가 절묘하다.

 

3. 왜 나무가 되어야 하는가?

나무 불꽃이라는 세 번째 소설의 제목은 아직도 불꽃의 진의를 잘 모르겠다. 베지테리언에서 비건으로 확장된 영혜는 우울증에 강박증에 조현병(정신분열증)에 거식증까지 앓게 되는데 그녀의 거식에는 두렷한 이유가 있다. 나무가 되겠다는 것이다. 더 이상 고기나 다른 무엇도 먹지 않고 물과 햇볕만 있으면 되는, 살기위해서 아무것도 공격하거나 파괴하지 않아도 되는, 그런 나무 말이다.

이미 마음속에서 그녀는 나무가 되어있다. 더 이상 아무런 것도 고민하거나 생각하지 않아도 되는 순수한 존재로써 작가는 나무를 상정하지 않았을까? 그런 강한 열망을 불꽃이라 하지 않았을까. 이런 영혜를 끝까지 지켜보며 떠나지 못하는 언니 인혜는 어쩌면 이 소설에서 가장 힘든 사람일 것이다. 그동안 무엇을 하며살았다기보다는 견뎌온 것이라는 자각에 이른 언니는 서서히 동생과 동질화되어간다.

[이 모든 것은 무의미하다.

더 이상은 견딜 수 없다.

더 앞으로 갈 수 없다.

가고 싶지 않다.]

산다는 게 무엇인가? 타인 혹은 다른 존재와의 경쟁과 착취와 희생 위에 자기의 존재를 지속하는 지금의 삶의 방식을 거부하고 작가는 영혜를 통하여 서로 해치지 않는 존재의 방식을 제안하고 있지 않은가. 영화 아바타에서 보듯이 나무의 정령과 인간의 정신이 연결된, 자연과 인간이 결합된 완전체를 꿈꾸는 것이 아니었을까?*

  • 작성일
  •   :  2017-06-15
  • 보   도
  •   :  과천독서클럽